솔직히 러시아 피아니즘 계보만큼 복잡한 것도 없다. 그 근간을 서유럽에서 가져왔음에도 각 계보마다 상당히 개성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엄연히 구분하자면 플레트네프는 베토벤부터 내려온 서유럽 피아니즘의 계보와 맞닿아 있다. 체르니-리스트-질로티-이굼노프-플리에르와 블라센코로 이어지는 계보의 마지막에 그가 있는 것이다. 플레트네프는 이러한 계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견을 내민다.

“계보라는 것이 반드시 연주자의 성격을 말해 주지는 못합니다. 같은 네이가우스 제자였던 길렐스와 리히터가 서로 연주하는 스타일이 달랐던 것을 상기해 보세요.” 그의 이러한 모호한 입장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어떻든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통을 잇는 적임자로 낙점한다. 그런 기준에 의하면 플레트네프는 전후에 태어난 제3세대 피아니스트가 된다. 이 제3세대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소콜로프·페트로프·데미덴코·루디·모길레프스키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실로 현재 러시아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중진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 가운데 플레트네프의 위상은 단연 돋보인다고 하겠다. 19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 이후, 꾸준히 변신과 변화를 모색해 왔던 그는 ‘지성과 감성이 자유롭게 조화된 가장 이상적인 피아니스트’로 칭송받으며 세계 음악계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왔다. 그런 그가 모든 예술활동이 국가적으로 통제되던 구소련 시절, 피아노 이외에도 오케스트라에 대한 꿈이 너무도 강렬하여 결국 동서 해빙무드를 타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만다. 1990년의 일이었다. 바로 그의 도전과 자유 의지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대지휘자 므라빈스키의 영광을 넘는 코스모폴리탄

플레트네프의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연륜으로 보자면 세계 일류 오케스트라치고는 빈약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10년 남짓한 이력으로는 내노라는 굴지 오케스트라들의 휘광 앞에서 촛불 정도의 밝기일 뿐이다. 그러나 1990년 창단한 이래 러시아의 두터운 음악 저변을 바탕으로 성장한 이 오케스트라는 이미 실력에서, 그리고 연주회 때마다 청중과 평론가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유수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했다.

“음악감독 겸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악보도 없이 100명의 단원을 이끄는 모습은 휘어잡는 듯하면서 정확했다. 이미 멋진 한몸이 된 오케스트라는 국제적인 앙상블의 힘과 광휘를, 전세계 어디서나 통할 ‘전천후’ 연주 스타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과거 러시아 교향악단 특유의 어두운 빛과 하나로 맺었다.”                                  -뉴욕 타임스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주어진 틀을 깨면서 러시아의 다채로운 음악 전통을 풍부하게 한다. 특히 목관과 금관의 매력은 다뉴브 건너 동유럽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것이다.”   -워싱턴 타임스

플레트네프와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첫 미국 연주회를 마쳤을 때 현지 언론들의 평이다. 어떤 이는 이 연주회를 일컬어 ‘폭풍’이라고 말했다. 이때는 유럽 순회 일정에서 성공적인 데뷔 연주회를 마치고 막 미국 내에 입성했을 때였다. 이로써 플레트네프와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 언론의 표현대로 ‘한몸’처럼 인식되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이후로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있을 때 진풍경처럼 등장하는 것이 ‘S.R.O.(Standing Room Only의 준말)’이라는 푯말이다. 즉, 티켓 구입을 서두르지 않으면 이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문 앞에 붙어있는 입석 외엔 자리가 없다는 쓸쓸한 안내문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플레트네프는 지금 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