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들면서 뛰어난 여성 연주자들 대거 등장
피아노 연주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낭만시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무대에 섰지만 쇼팽·리스트 이후 연주계의 거장으로 기억되는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이 남성이라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도 세계 유수의 음악원에는 여자 피아니스트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연주자들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확고한 음악 세계를 가지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많은 여성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그들의 재능과 노력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야 마땅하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정상에 우뚝 선 연주자들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콩쿨에 과제곡조차도 남녀를 구분했던 과거의 남성 우월주의적 정서와 결혼과 함께 동반되는 출산·육아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여성 피아니스트들을 제한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클라라 슈만의 뒤를 잇는 소피 메트너, 전설적인 테레사 까레뇨를 필두로 여성의 본격적인 연주계 진출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활발해져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타났다.
나디아 불랑제·지나 박하우스·릴리 크라우스· 마이라헤스· 클라라 하스킬·니콜라예바 등 독특한 색깔을 가진 연주자들이 남성 연주자들의 대열에서 뒤지지 않는 연주력을 과시했다. 또한 20세기 후반에 배출된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알리사 데 라로차와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성별을 초월한 탁월한 연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라로차는 5월 23일 80세 생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세계 순회연주를 할 만큼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 피아노계의 우먼 파워 그룹의 선두주자는 아무래도 라로차 보다 20여년 아래인 아르헤리치가 아닐까 싶다.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나이인 40세쯤에 다시 무대로 돌아와 세계 정상에 선 라로차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아르헤리치는 60세가 되기 전에 이미 피아노 연주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직까지 아르헤리치에 비길 만한 카리스마와 테크닉을 가진 연주자가 나서지 않았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만큼 그녀의 연주력에는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 딱히 말로 설명되지 않는 아르헤리치의 독특한 카리스마는 뛰어난 연주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두드러지면서 그녀를 이 시대의 가장 추앙받는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아르헤리치의 카리스마 실체는 무엇일까? 그동안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유명세에 비해 공개된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바로 작년에 조오지 가쇼에 의해 다큐멘타리 형식의 영상자료가 만들어져 뉴욕 영화제 등지에 출품되어 세인들에게 클래식 음악세계와 아르헤리치 음악관을 알릴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반가운 일이다. 60여 분 정도의 길이인 이 필름은 ‘Conversation Nocturne’이란 제목으로 아르헤리치의 인터뷰와 연주 실황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그녀의 가장 최근에 모습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연주 케리어를 보여주어 자료로서 큰 몫을 하는 것은 물론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다큐멘타리라고 한다.

♠ 남미의 정열을 닮은 마르타 아르헤리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나 3세에 처음 피아노를 접했고 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워 8세에 연주계에 데뷔를 할 만큼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린 소녀의 음악적 활동에는 어머니의 감시와 강요도 있었고 남다른 연주 일정과 연습 때문에 정규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던 아르헤리치는 훗날 이때의 기억을 잃어버린 유년기라고 회고한다.
14세 되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