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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전공하면서 제가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던 때도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도 해봤고, 좌절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 중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하하. 제 연주가 마음에 드는 순간부터 음악이 재미없어질 것 같은데요.”
‘이제껏 마음에 드는 연주가 있었느냐’는 기자의 첫 질문에 양성원은 시원스런 웃음과 함께
이렇게 대답했다. 이어지는 그의 뒷말이 더욱 ‘양성원답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음악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든다면, 제가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발전하려 할까요?”
야노스
슈타커와의 만남
세의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한 양성원은 피아노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7세 때
아버지의 권유로 첼로를 잡게 됐다. 왠지 첼로라는 악기에 친근감이 느껴진 그는 우연히
야노스 슈타커의 연주를 듣게 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첼로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고 말았다.
그의 나이 11세 때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가게 됐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아버지 양해엽(바이올리니스트)이 주불 문화원장의 자리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선택은 아들 양성식(바이올리니스트)과 양성원, 두 사람에게 더 넓은 세계를
경험케 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자신의 직업을 바꿀 만큼 아들들의 음악교육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의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새삼 느끼게 한 일이었다.
“음악을 전공하면서 제가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던 때도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도 해봤고, 좌절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 중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파리음악원을 다니면서 사춘기를 겪은 양성원은 다른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일도
많았고 첼로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형은 그에게 가족 이상으로
큰 힘을 북돋워주곤 했다.
“사춘기 때 특별히 부모님이 저에게 ‘이렇게 해라’하고 도움을 주신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들은 저를 그냥 내버려두셨어요.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자립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죠.”
자연스럽게 그 시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주신 부모님 덕택(?)으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일찍이, 그것도 부모님과 함께 한 생활이었기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학생활이었지만 그만큼
책임감이 많았고 어깨가 무거웠다.
“항상 아버지께서 강조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동양인이 유럽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과
같아서는 절대로 안되며, 오히려 몇 배 더 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예의 풍습 역시 그들보다 더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죠.”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고들 하는데, 실제 유럽이나 미국인들은 그런 끈끈한 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언뜻 보면 가까워 보이는 사이일지 몰라도 실제 많은
거리감이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냉정한 사회라는 것이 양성원이 느낀 유학생활의 가장
힘든 점이었다.
파리음악원 졸업을 1년 앞둔 그는 형의 인디애나 폴리스 콩쿨 참가로 스위스에 가게 됐다.
마침 그곳에서는 서머스쿨이 열리고 있었고 그는 야노스 슈타커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
“수십 명의 학생들 앞에서 드보르작 콘체르토 1악장을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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